2023. 1. 10. 17:43ㆍ일상 그리고 생각
이날치 밴드’는 걸출한 소리꾼 넷에다 베이스 기타 둘에 드럼이 합세한 퓨전 밴드다. 징글징글한 역병의 세월을 그나마 버티게 해준 ‘국뽕 열풍’에 한 바가지 기름을 더해준 그들의 히트곡 ‘범 내려온다’는 알다시피 <별주부전>의 한 토막을 달군 것이다. 간을 구하러 육지에 올라오느라 기진맥진한 자라가 토끼를 발견하고 ‘토(兔) 선생’을 부른다는 것이 발음이 헛나와 ‘호(虎) 선생’이라 소리치는 통에 에나 ‘범’이 내려온다는 살 떨리는 장면을 코믹하게 묘사한 노래다. 제 간 정도는 꺼냈다 넣기를 일 같잖게 할 수 있는 양 허풍을 떠는 토선생과 능란한 모사꾼 별주부가 벌이는 포복절도할 이야기의 그 토끼가 주인공 노릇 하는 묘년(癸卯年)이다.
‘계묘년’은 역사 속에 이렇다 할 굵직한 사건이 없어 그런지 낯선 간지다. 태양력을 기준으로 삼는 요즈음은 달력 막장을 넘기면 곧바로 간지가 바뀌는 걸로 치지만 사실 새 간지가 시작되는 시점을 세종대(1444년)에 정했으니 당연히 음력이다. 달력 발행과 표준시를 관장하는 국립한국천문연구원 홈페이지를 들어가니 ‘생활천문관’이 매긴 오늘(2023년 1월 4일)의 간지는 아직 임인(壬寅)년 계축(癸丑)월 임술(壬戌)일이더라. 설날인 22일에라야 비로소 계묘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리학에서 역법은 시작을 입춘 기점으로 본다. 태어난 연월일시를 상징하는 네 기둥의 여덟 자 간지에 스며든 우주의 기운과 새롭게 다가오는 운수 외의 관계 함수를 푸는 것이니 그게 이른바 ‘사주팔자를 본다’는 것이다.
일각에 팔자가 달라질 수 있으니 절입의 시각(절기가 바뀌는 시간)에 엄격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꼽는 새해의 시작은 오는 2월 4일이다. 그러니 간지가 바뀌는 이맘때부터 입춘에 이르기까지의 넉넉한 기간이 점집이나 철학관의 보장된 성수기인 셈이다. 별자리, 혈액형, 타로 에니어그램을 거쳐 요즘 각광받는 대세라는 MBTI가 서양에서 온 거라면 사주 궁합 풍수는 이 땅에 흥건히 배어 있는 요지부동의 미래 예측 기제다.
출마를 작정한 정치인들이 조상 묘를 이장했다든지 기업 총수가 역술인의 점괘를 믿고 투자 결정을 했다가 거액을 날렸다든지 하는 풍문에도 사람들은 딱히 개의치 않는다. 다가올 것에 관한 호기심과 궁금증과 무섬증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인간의 관심사일진대 행여 내게 닥칠지도 모를 미래의 불운을 행운으로 대치할 수 있다면 어디에 기대건 존중한다는 의미리라.
그러나 작금에 이 나라서 벌어지는 일이 황당한 것은 그런 사술이 공적인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흰 바지저고리 허연 수염에 머리채 길게 늘어뜨린 자가 달통한 포즈로 만사를 재단하는 장면이 여기저기서 비친다. 문제는 그게 언필칭 ‘스승’이란 이 자의 혼몽한 헛소리에 그침이 아니라 국사에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지속되는 의문이다.
준비 없이 결행된 대통령 집무실의 무모한 이전이나 적반하장의 뻔뻔함을 드러낸 ‘날리면’소동, 이태원 참사 분향소 앞서 벌이는 인면수심의 맞불 집회 같은 황당하고 참혹한 일이 도처에서 벌어진다. 그럼에도 언론 명색은 모르쇠로 눙치는 것이 떼로 몰려다니며 조국 일가를 조리돌리던 때와는 전혀 딴판이다. 한 줌도 안 되는 법 기술자들이 또다시 ‘법치’를 외대며 찍어 누르려 든다. 그간 이 나라가 쌓아온 민주적 역량이란 것이 이리도 허약했던가 하는 허망함과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모멸감에 입이 쓰다. 얼마간은 고통의 세월을 감내해야 할 처지에 놓인 듯하다. 팔자소관인가.
출처 – 단디뉴스 [홍창신 칼럼]
처음 접하는 신문, 처음 접한 칼럼니스트지만...그의 글에서 힘이 느껴진다.
세상엔 참...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음을 또 한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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