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6. 14:36ㆍ일상 그리고 생각
옷걸이에 걸린
상의(上衣) 하나, 설레고 있다
공중을 아랫도리로 삼고
주머니마다 어지럼증이 가득해
어느 바람에나 잘 흔들린다
단추가 없는 상의는
실이 꿰어진 바람의 눈이고
흔들리는 레이스는
피지 않은 바람의 깃이다
반나절은 하마터면
날려갈 뻔한 외출이었다
- 안은숙 시인 -
빨랫줄 옷걸이에 레이스가 달인 ‘상의(上衣) 하나’ 걸려 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는 널어놓은 빨래다.
연일 반복되는 일상은 심신을 지치게 한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티가 나지 않는 집안일을 마치고는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린다.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상의 레이스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옷걸이에 걸린 옷처럼 집안일에 묶여 있다는, 내 삶의 위치와 가치를 생각하다다 마음이 심란해진다.
“어느 바람에나 잘 흔들린다” 했지만 어지간한 바람으로는 옷걸이를 벗어날 수 없다. 마른 옷은 다시 옷장에 걸리는 신세가 된다. 레이스가 달린 옷의 한때를 추억하거나 외출하는 상상만으로도 잠시 설렌다.
옷은 이탈, 사람은 일탈인데 둘 다 바람이 매개다. “공중을 아랫도리 삼”았으니, 외출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피지 않은 바람의 깃”이다. 일탈은 상상에 그치고, “하마터면”이라는 말에선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한다. 삶으니 변화는 상상 그 너머에 있다.
신문의 칼럼란을 뒤지다가 '설레는 의상'이라는 제목이 독특해 클릭 버튼을 눌렀다.
시도 멋지고, 그 시를 해석한 시인의 시각도 신선하다.
지난 주말 언니와 첫 캠핑을 하며 한동안 밀렸던 대화를 했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도록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렸던 언니는 뒤늦게 삶의 풍파를 겪고있다.
이 시를 읽으며 자신감, 자존감을 잃어가는 언니가 떠올랐다.
누구나 화려한 외출, 일탈을 꿈꾸는 데 현실에 발목잡힌...
비단 언니만이 아니라 나또한 그렇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니까...
시에서 처럼 고단한 일상을 잊는 짧은 상상속 외출이라도 좋으니, 언니가 매일의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즐겨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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